김광종
  김유정의 만무방
  

김유정의 단편 소설이다.

응칠이라는 사람과 그의 동생 응오의 이야기이며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응칠이는 가난에 못 이겨 가족들과 헤어져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송이도 캐고 팔고, 연명해간다. 전과 사범. 절도 도박.

그의 동생 응오는 소작농.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

응칠이는 아내와 떨어졌다. 같이 살아도 별 수 없어서 그렇게 각각 흩어져 빌어먹기도 하고 살아간다.

도박판에 나타난 사람들. 소작농, 상투.

응오는 어렵사리 번 돈으로 맞이한 아내가 몹시 아프다. 그는 지주에게 대든다. 그러다 아예 그 지주의 벼를 훔쳐버린다. 응칠이는 이 도둑을 잡기 위해 기다리다가 결국 자기 동생을 잡는다. 그리고 움씬 두들겨팬다.

모순과 갈등.

일제는 한반도를 착취하고, 한반도의 지주들은 소작농을 탈취한다. 이 상황에서 소작농들은 또 자기들끼리 싸운다.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다. 김유정은 그런 현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다양한 소탈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그 현실을 극화한다.

김유정은 이 소설을 씀으로써 무엇을 바랬을까? 객관적으로 사실을 바라보도록 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근본적 문제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산모가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 말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다. 예수님 같은 분들을 제외하곤. 개인의 삶과 사회의 현실은 같이 맞물려 간다.

형제 간의 모순, 소작농과 지주 간의 모순, 도박판에서 따는 사람과 잃는 사람의 모순.

이 모순들의 시작은 무엇이고, 그 해결점은 어디일까?

응칠과 응오는 모순이다. 응오는 형 대접을 잘 안한다. 응칠이는 그것이 싫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응칠이는 응오를 흠씬 두들겨 팬다. 그리고 업고서 간다.

왜 아벨은 그 형 가인에게 맞아 죽었을까? 응칠이는 가인은 아니다. 응오는 아벨도 아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 너무 어려우면 인심이 각박해진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 성령 충만함으로 그들은 이 모순을 극복해간다.

만무방에서 김유정은 하느님을 언급한다. 그리고 아리랑 노래를 올렸다.

우리 민족은 고래로 하느님을 찾아왔다. 하느님은 어떤 해결 방식을 원하실까?

모두의 몫이다. 그런데 그 몫의 크기가 다르다. 그래서 많이 맡은 자에게서 더 많이 찾으신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과 모순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권력자와 일반 국민들, 재벌과 중소기업, 자본가와 노동자, 교사와 학생, 학벌, 가정 경제를 두고서 남편과 아내가, 용돈과 상속을 둘러싼 형제 자매의 투쟁, 바다 이야기, 게임방, 애플과 삼성, 통신업체와 사용자.

대형 교회와 동네 교회. 은행과 대출자. 제2금융권과 저신용자. 사채업자와 신용불량자. 헤지펀드와 개미들. 집주인과 세입자.

대형 기획사와 소녀 가수들, 조폭과 술집 주인, 술집 주인과 접대부 아가씨들. 신부와 수녀. 목사와 전도사. 장로와 평신도.

대형 교회는 왜 교인을 계속 늘리려 하는가? 전도해서 그 동네 교회에 나가게 할 수는 없는가? 왜 형은 동생보다 더 많은 용돈을 쓰는가? 나는 오늘도 누구를 착취하고 있는가?

이 모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정약용 선생의 말씀처럼 단번에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묘책은 존재하는가?

하느님은 이 모순 가운데 어디에 계시는가? 교회는 이 모순들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오히려 모순 해결보다 모순을 증폭하고 또다시 생산해내는 것은 아닌가?

응칠이에게 맞은 응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형제의 모순은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모택동은 민족 내의 모순보다 외세와의 모순을 먼저 풀어야 한다고 말하고서 국공 합작을 통해 일제와 맞서 싸웠다. 우리가 먼저 싸워야 할 모순은 무엇이고 그 다음에 또 없애 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응오의 말처럼, 내 것을 도둑질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내 것을 도둑질해야 하고, 그것 때문에 들켜서 움씬 맞아야 하는가?

내 것이 무엇인가? 천부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존 로크의 투쟁의 사상이 지금의 민주주의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경제적 민주주의란 말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새누리당의 언사는 가증한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의 핵심은 부르주아들의 재산이고 생명이었던 것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쁘띠 부루즈아들을 마름으로 삼아 7등급 이하를 착취하려는 야심인가?

그들은 오늘밤 같이 모여 도박판을 벌이고 술판에서 흥을 돋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심판의 낫을 들으시리라. 각자의 책임을 물으며.

왜 응칠이는 독립 운동에 직접 나서지 못했을까? 왜 응오는 소작농 투쟁을 이끌지 못했을까? 이 소설의 결말은 그것을 예고하는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은 계속 되고 있고, 한국 정부는 눈감고 있으며 위하는 척만 한다. 일본 정부는 침묵이다. 일본은 여전히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말하며, 일제 강점은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고 말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거대 정당들이 신생 정당들을 내리 누르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레닌이 말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장 약한 쇠사슬의 부위를 힘껏 내려쳐야 한다. 그런데 레닌의 후예는 스탈린이 되어서 더 큰 악을 저질렀다. 짜르보다.

우리는 언제나 다윗을 만날 수 있을까? 응칠와 응오를 구해줄, 그들의 아내를 다시 살려줄 다윗은 어디에 있는가?

착취의 최상층에 선 자는 누구인가? 이들을 제거하면 모순은 해결되는가? 사탄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회는 마름인가? 목사는 마름의 두목인가?

자본주의 체제의 충실한 종이 되어버린 대형 교회들은 사탄의 하수인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그토록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셨는가?

예수님의 주 공격 대상자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점은 무슨 이유일까? 왜 예수님은 로마보다도 이들을 더 큰 죄인이라고 하셨을까? 빌라도에게 자신을 넘긴 자들이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왜 예수님은 그렇게 허망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 모순의 극대점에서 자기 희생을 나타내신 이유는? 우리도 결국 그렇게 해야 하나?

응칠이의 삶과 예수님의 삶은 그래서 다른 것인가? 나에게 정치에서 하나님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교회에서는 정치를 말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과 정치는 무슨 상관이며, 교회는 정치의 진공 상태인가 아니면 정치의 하수인인가? 교회는 정치의 하수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치를 말하지 말라 한다. 목사들은 집권 세력과 교회 뒷문에서 결탁한다. 그리고 그들의 설교 가운데 교묘하게 보수를 포장하여 집권 세력을 도운다. 그러다가 그들은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발언을 하면 정치를 배제하라 한다.

그들의 체제 순응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모르게 만들면서.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세포 속까지 정치적이며, 그 체제에 순응하고 있다.

응칠이는 이 목사들, 상투들에게 당한다. 아벨은 가인에게 맞아죽었고, 예수님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연합 작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투쟁해야 한다.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이것이 김유정이 만무방을 통해 당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이번 선거를 통해 수서 아파트 단지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개포 주공의 식당에서 이런 응오와 응칠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의 울분.

거기엔 성팔이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대는 응칠이의 아내인가, 아니면 응오의 아내인가. 응칠이의 자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인쇄하기] 2012-04-13 04: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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