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김광종
  왕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왜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곧 자기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요? 당연히 메시야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다면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시고 그 위용을 드러내셔야 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모습으로 인해 여러 신학이 생겨났고, 이는 아리랑당의 정치 즉 기독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당시 유대인들도 혼란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정확히 정리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나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정치적 행보에도 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여전히 왕이셨다.

부모가 자식의 잘못으로 인해 또는 그 악한 자녀들로 인해 두둘겨 맞는다 하여도 그 부모가 그 자식의 부모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 부모는 자식에게 맞으면서, 그 자식에게 부모의 길, 부모의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이 반성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길 바라면서 묵묵히 맞아주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왕이셨지만, 자신들의 종에게 맞으시면서도 그 종들을, 그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는 본을 보여주셨던 것 뿐입니다.

열 두 영 더 되는 천군을 불러들여 로마 군대와 바리새인들을 박살내실 수 있으셨지만, 오직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왕이셨지만 그 십자가 사역을 다 치르신 것입니다.

왕이 아니셨던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십자가 사역을 치르셨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자체가 왕의 행위였습니다. 비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 행위이셨던 것입니다.


2. 어떤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나.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죄에 대한 속죄제가 필요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 관계를 다시 연결하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첫번째 희생을 받으셨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이 희생의 제사를 계속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물 자체가 불완전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명한 제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간극을 영구히 해소할 제물은 오직 한 분 즉 하나님 자신 밖에 없으셨습니다.

사탄은 타락했고, 이 사탄으로 인해 인류가 배신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배신자들, 사랑을 저버린 자들을 다시 돌아오고 신실한 삶으로 바꾸는 길은 모범과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그 사랑과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얼마 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세계를 다시 창조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왕의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 그러면 끝까지 십자가인가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사탄과 이 세상의 타락한 왕들을 처단하시는 일을 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한 번이십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 권력으로, 즉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받으신 권력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 폭력적 권력을 얻기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사랑의 예수님께서 이젠 폭력의 예수님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4. 그럼 정치는 무슨 상관인가

정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워야 합니다. 정치는 사랑이며, 희생입니다. 그러나 결국 정치도 폭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처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유대인들의 오해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자 마자 폭력으로 임하시리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정복하지 않으시는 모습에 실망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고, 민중 반란 주도자 바라바를 대신 살렸습니다.

이 땅에 첫번째로 오신 예수님은 희생의 왕, 사랑의 왕의 모습이 되심을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먼저 하셔야 하는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민족을 위기에서 구할 분으로만 착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위기는 로마가 침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음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먼저 회개하라고 외치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을 영원히 그 죄에서 구원할 희생의 제물, 하나님이 친히 십자가에 달리실 그 제물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도 그들의 죄악을 인해 채찍에 맞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님, 즉 메시야께서 유대인의 왕만 되신다고 착각했습니다. 분명히 성경 여러 군데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6.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인들의 오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해했고,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오늘날도 여전히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없습니다. 이젠 만주의 주가 되셨고,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전달자이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전달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의 타락한 정치가들과 야합하였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로마와 야합하듯이.

두번째 오실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폭력의 예수님이시며, 심판의 예수님이십니다. 이 불의한 세계, 불의한 자들, 불의한 부자들, 불의한 권력자들, 불의한 종교 지도자들을 처단하실 폭력의 예수님으로 오실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불의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의자들 앞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정의를 외쳤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주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표 목사라고 하는 자들은 당당한 불교 앞에서도 잠잠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들이 옥한흠, 오정현, 김삼환, 조용기, 김지철 등입니다.

7. 우리는 옳은 것을 옳다고 외쳐야 합니다.

불교가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이다고 말해야 하고, 불의한 정책을 만드는 자들이 가증스럽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해야 하고, 가증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아가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해내야 하기 때문에 진리로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십자가도 지고, 정치 권력도 행사해야 합니다.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으니, 이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가 가득한 곳,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일을 구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치입니다.



2011-04-05 11: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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