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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 -구성과 편찬
  

<論語>는 공자 일생의 언론 및 행위의 총기록이다. 《論語》의 대부분은 짧으면서도 의미가 유장한 문답체인데, 간혹 서사적인 글도 보인다. 《論語》는 모두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0장(章)은 20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20 챕터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里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 이렇게 모두 20장이다.


여기 20편의 각 명칭은 특별히 어떤 내용상의 차이로 구분했던 것은 아니고 단지 당시 필사도구가 죽편(竹片/대나무 조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양으로 한무더기씩 묶어 첫번째 대나무 조각의 첫 두 석자를 취해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학이편(學而篇)의 첫구절은 「子曰 : 學而時習之.....」이고, 또한 헌문편(憲問篇)의 첫구절은 「憲問恥.....」이다. 따라서 짐작컨대 각각 나누어진 대나무 조각의 옆에 구분하기 쉽게 써놓았던 표기가 그대로 명칭이 된 것이지 무슨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는 도대체 누가 언제 편찬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연구룰 종합하면 대략 다음 3가지 설로 압축될 수 있다:

1. 공자 생전에 편찬되었으며, 또한 공자 본인의 심의를 거쳤다

이런 주장은 위진남북조 시대 양대(梁代) 황간(黃侃)이 《논어의소論語義疏》에서 가장 먼저 제기했고, 청대(淸代) 요연(寥燕)이 《이십칠송당집二十七松堂集》권칠(卷七) 《잡저雜著》, 그리고 이공(李恭)의 《평을고문評乙古文》에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박약한 것이 문헌상으로 받쳐줄만한 증거가 없다. 그들 주장의 주요 근거는 「성인의 글은 대단하신 것인데 어떻게 딴 사람이 대신 써줄 수 있나」라는 점에 집중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공자는 대성인이신데 성인의 어록이란 위조할 수가 없고 위조하려해도 그건 불가능하단 뜻이다. 게다가 《논어》의 이야기는 성인의 말씀인데 틀림없이 성인이 직접 교정을 보았을 것이다. 제자들이 감히 편찬할 수도 없고 편찬하려 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략 이런 주장이다.

이런 논조는 물론 믿을 것이 못된다. 문헌적인 근거가 있는 주장도 안되고, 단지 공자를 너무 숭배한 나머지 공자의 언론과 행위기록인 《논어》마저도 신성시한 결과라 하겠다. 실상 《논어》를 보면 제3자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대목도 보이고, 또한 공자가 죽은 후의 사실을 기록한 부분도 보인다. 그렇다면 《논어》가 공자 생전에 편찬되었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2. 공자 제자가 편찬했다

이 주장은 서한(西漢) 말엽 유향(劉向) 당시 이미 제기되었고 또한 동한(東漢) 때의 반고(班固)가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언급했으며, 백호통의(白虎通議),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정설편 등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명확하게 어떤 제자가 편찬했다고는 꼬집어 내진 못했다.
제자의 이름을 처음으로 거명한 학자는 동한(東漢)의 정현(鄭玄)인데 청대 송상봉(宋翔鳳)이 편집한 정현(鄭玄)의 《논어서(論語序)》에 공자 제자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편찬했다고 했다. 후세 학자들 중에는 정현의 주장에 많이들 동의해지만, 구체적인 제자의 이름에는 약간의 차이가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에도 헛점이 노출된다. 정현이 주장한 그 설이 도대체 무슨 문헌에 근거했냐는 하는 점이다. 후세 학자들은 정현의 주장에 근거를 찾아냈는데 그 근거라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어느 챕터에 어느 제자의 말이 많이 들어있으면 그 제자가 편찬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다소 복잡해진다. 《헌문편》에는 원헌(原憲)의 언행이 제일 많고, 《선진편》에는 민자(閔子)의 말이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편찬자의 명단에 원헌과 민자를 추가해야만 할까?


둘째, 아무개를 자(子)란 용어로 호칭했다면 편찬한 사람은 아무개의 제자일거다. 송대(宋代) 육구연(陸九淵)이 《상산어록(象山語錄)》에서 《논어》에는 공자 이외에도 유약(有若), 증석(曾晳) 등도 자(子)란 호칭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제자가 편찬했다고 주장했다. 알겠지만 자(子)란 호칭은 옛 중국에서는 아무나 붙일 수 없었다. 일종의 존칭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훌륭한 선생님의 뜻이다. 따라서 육구연은 유약이나 증석보다 젊은 자하(子夏) 등이 편찬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인 게, 젊은 사람이라면 도대체 몇 살 아래인지 몇 십살 아래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유약이나 증석의 동문 사제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고 그들 후배의 제자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주장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3. 전국시대 중엽 유가계열의 학자들이 속속 편찬했다

이 주장은 다소 늦게 제기되었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당대(唐代) 유종원(柳宗元)은 《논어변(論語辯)》에서 「《논어》중에 증자(曾子)의 사망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공자로부터 한참 후의 일인데....」이 의문은 대단히 강력하다. 그 뒤로 학자들이 하나 둘씩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논어》에는 공자가 죽은 뒤 한참 후에 일어난 사건이나 인물이 상당수 들어 있으므로 공자가 죽은 뒤 얼마 안되어 《논어》가 편찬되었다는 설도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국시대 중엽 쯤에 편찬되었다고 해야 말이 된다. 그 다음으로 전국시대 중엽 사람인 맹자(孟子)가 공자의 말을 직접 인용한 것이 28번이고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4번인데, 그 인용문을 현재 《논어》의 문장과 비교해 보면 같은 것이 12조목에 불과하다. 게다가 글자에도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만일 《논어》가 《맹자(孟子)》란 책 이전에 이미 정형화되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특히 맹자가 직간접으로 인용했지만 그게 《논어》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그런 조목 중에 매우 중요한 문장도 있다. 만일 《논어》가 이미 정형화되었다면 맹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또 다른 공자의 어록을 입수하여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공자왈 공자왈 하며 인용했겠으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건 공자의 말이었다고 인정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논어》가 전국시대 중엽 유가학자들이 편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청대의 최술(崔述)은 몇 가지 근거를 제기했다. 이 근거는 근대 학자 양계초(梁啓超)가 《고서진위급기년대(古書眞僞及其年代)》란 책에서 극구 칭찬한 바 있다.

최술의 주장은 이러하다.. 《논어》의 전반부 10편은 비교적 초기에 편찬되었고, 후반부 10편 중에서도 특히 끝 5편은 비교적 늦게 편찬되었다. 근거는 이러하다..

첫째, 《논어》의 전반부 10편은 문체상으로 보아 간단하고 짧으나, 후반부 10편 중에서도 특히 끝 5편은 긴 문장이 등장한다. 또한 전반부 15편에는 총괄하는 말이 없으나 후반부 5편은 총괄하는 말이 있다. [문장의 형식으로 보았을 때 전반부 10편은 간단하고 짧은 반면 후반부 10편은 상당히 길다. 가령 후반부 10편에는 공자와 관련된 언행을 기록한 한편의 글이 무려 400여자에 달하는 것도 있다. (<자로증석염유공서화시좌>는 무려 415자, <季氏將伐...>는 274자에 달함)]

둘째, 호칭을 유심히 살피면 전반부 10편은 공자의 말에 일률 「자왈(子曰)」이라 칭하지만 후반부 10편은 「공자왈(孔子曰)」이나 「부자왈(夫子曰)」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후반부 10편이 나중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공자에게 존칭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따로 분류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전반부 10편은 대개 「제자가 묻기를..」로 되어 있지 후반부 10편 처럼 「제자가 무엇에 대해 묻기를..」의 형식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셋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볼 때 후반부 10편은 오류가 있다. 우선 《論語》제17편 <陽貨>에 「불뉴가 부르자 공자가 가려했다」란 구절이 보인다. 그런데 불뉴은 趙簡子(조간자)의 中牟邑의 수령이었는데 그가 中牟邑(중모읍)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공자는 이미 죽었다. 따라서불뉴가 中牟邑(중모읍)에서 공자를 반란에 가담시키려 하자 공자가 참여하려 했다는 기록은 근본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과 위배되는 《論語》의 기록 중 하나이다. 또한 같은 <陽貨>편에 「公山弗擾以費叛, 召, 子欲往」--公山弗擾가 費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공자의 참여를 종용하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란 구절이 보인다. 公山弗擾(공산불요)는 노나라 季氏(계씨) 문하로 公山不 (공산불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사람이 費(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공자는 노나라의 大司寇(대사구/법무부장관)였다. 법무부 장관으로 반란을 응당 토벌해야할 위치에 있던 공자가 반란에 참여하려고 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특히나 공자처럼 君臣關係(군신관계)에 엄격한 사람으로서는 말이다. 또한 <季氏>편에 「季氏가 ...정벌하려 했는데...>란 구절이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염유는 공자 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든다. 공자 말년에 비로소 정치에 참여했다. 子路의 경우는 공자 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든다. 거의 공자의 나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염유와 子路가 동시에 季氏 밑에서 근무했다는 것도 논리상 납득하기 힘들다. 이상 몇 가지 사례는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기록이다. 이런 착오는 공자 당시나 공자의 바로 아래 제자들이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상당 기간 흘러 후세 사람들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범한 오류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論語》의 후반부 10편은 공자가 서거하고 상당 시간이 흐른 뒤 후세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상 오류는 공자로부터 시대가 상당히 흐른 후 기억이 모호해진 후세 제자들에 의해 범했을 것이다.

넷째, 사상적인 관점에서 보아 후반부 10편은 비관적이거나 염세적(厭世的)인 면모가 엿보이는데 이는 노장사상(老莊思想)과 통하는 것이다. <미자편(微子篇)>에 은둔자로 등장하는 장저와 걸익 이야기나 <선진편(先進篇)>에 보이는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 시좌(侍坐)」 등이 그러한데, 이는 전반부 10편과는 성격상 상당히 다르다고 하겠다.

이상 최술(崔述)의 관찰은 대단히 정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논어(論語)》의 전반부 10편과 후반부 10편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보충한다면 전반부 10편 중에 전반부 8편은 주로 기언(記言/말씀을 기록)을 위주로 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뒷 2편은 기사(記事/사건을 기록)의 경향이 있다. 이는 전반부 8편을 먼저 편집하고 나서 보충하기 위해 나머지 2편을 수록하고 대략 끝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제 11편부터 다시 기언(記言)이 시작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챕터의 시작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본다면 전반부 10편이 비교적 초기에 편찬되었고, 후반부 10편은 그뒤로 점차 편찬된 것으로 생각된다. 짐작컨대 공자(孔子) 문하의 여러 갈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계보를 통해 전해지는 공자의 언행(言行)을 편집하여 전반부 뒤에 속속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끝)

출전: 한양대 중문과 이인호교수님 홈
< target=_blank>http://web.hanyang.ac.kr/~pendar/>
2002-04-24 2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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