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수
  도입부 문제의 제기-진보 속의 빈곤
  

도입부 문제의 제기-진보 속의 빈곤



청량리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에 의하면, 서울의 고층빌딩이 높아갈수록 가난의 어두운 그림자는 더 짙게 드리워진다. 문명이 진보하여 생산 파이가 커지는데 왜 빈곤은 사라지지 않고 심화되는가, 곧 '진보 속의 빈곤 '이라는 문제를 헨리 조지는 제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진보란 구체적으로 생산파이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며, 빈곤이란 구체적으로 노동자의 빈곤, 즉 저임금과 실업문제를 의미한다. 헨리 조지가 이 책에서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바로 저임금과 실업문제라는 노동자의 빈곤이었다.

헨리 조지가 실직자와 저임금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의 문제를 가슴에 안고 '진보와 빈곤의 역설'을 풀기 위해 몸부림친 그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헨리 조지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가슴으로 책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보와 빈곤>을 공부해 나가면서 이러한 따뜻한 가슴으로 지성의 칼날을 예리하게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하는 헨리 조지의 저작들 중에서 '진보 속의 빈곤'에 대한 헨리 조지의 언급들이다.


"지난 세기에 살았던 프랭클린이나 프리스틀리 같은 인물이, 증기선이 범선을 대체하고, 기차가 마차를 대체하고, 수확기가 낫을 대체하고, 탈곡기가 도리깨를 대체하리라고 예견할 수 있었을까? 또 지구상의 사람과 가축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힘을 내면서 시키는 대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엔진의 고동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또 사람이 손을 거의 대지 않는데도 숲 속의 나무가 문짝, 문틀, 창문가리개, 상자, 술통 등의 목제품으로 변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또 과거의 구두공이 구두창을 붙이는 것보다 더 적은 노동으로 장화나 구두가 상자 떼기로 생산되는 공장은? 또 여공 한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에 수백 명의 건장한 직조공이 수직기로 짜던 것보다 더 빠르게 목화가 천으로 변해 나오는 공장은? 또 대형 샤프트와 거대한 닻을 만드는 증기 해머나 작은 손목시계를 만드는 정교한 기구는? 바위를 뚫는 다이아몬드 드릴이나 고래기름을 대체하는 석유는? 또 교환과 통신 시설이 개선되어 노동이 대폭 절약된다는 사실, 예를 들어 호주에서 도축한 양고기를 영국에서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든지, 오후에 런던의 은행원이 발송한 주문이 같은 날 오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만일 이러한 수많은 발전을 예견했다면 인류의 사회 상황이 어떻게 되리라고 추리를 했을까?

사실 이 정도는 추리라고 할 것도 없다. 그들은 발전의 결과로 나타날 사회 상황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예상했을 것이고, 마치 사막의 목마른 대상(隊商)이 바로 눈앞에 살랑거리는 수풀과 반짝이는 샘물을 언덕 위에서 바라볼 때처럼 심장의 고동이 뛰고 신경이 전율했을 것이다. 새로운 힘에 의해 사회가 근본에서부터 개선됨으로써 극빈층도 전혀 부족함을 느낄 수 없고 최하층도 생활물자의 결핍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상상의 눈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지식의 마술램프에서 나온 노예가 과거의 저주받은 노동을 대신하고 무쇠와 강철로 된 근육이 극빈 노동자의 생활을 휴일처럼 만들어 주어, 높은 자질과 고상한 본성이 자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또 물질의 풍요에 따른 당연한 귀결로 도덕 수준이 높아지고 인류가 꿈꾸어 온 황금시대가 이룩될 것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못 크는 일이 없고 노인이 물자 부족으로 시달리는 일이 없으며 젊은이는 열심히 일하는 한편 찬란한 별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인다! 악은 사라지고 불화는 조화로 변한다! 모든 것이 풍족한 곳에 어찌 탐욕이 있을 것인가? 빈곤이 사라진 세상에, 빈곤 또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인 죄악이나 범죄나 무지나 잔인함이 어찌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자유인인데 누가 굽실거리며 살 것인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에 어찌 압제자가 있을 것인가? ({진보와 빈곤})


"어느 사회에서든 물질적 진보가 이룩되면 빈곤과 그 부수적인 문제가 같이 나타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진보가 일정한 단계에 이른 곳마다 존재하는 사회문제는 어느 지역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진보 그 자체에 의해 발생됨을 알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금세기에 들어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또 지금도 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을 퇴치하거나 고통받는 노동자의 짐을 덜어주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빈부격차를 더 심하게 하고 생존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꼬리를 이은 발명의 덕으로 인류는 일 세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힘을 갖게 되었지만, 고도의 노동절약적 기계장치를 갖춘 공장에서 어린이들이 일에 시달리고 있다. 새로운 힘이 만개한 사회에서 대중이 자선에 의지해서 살아가거나 그 한계선상에 있다. 거대한 부의 축적 속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갓난아이들은 나오지도 않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다. 어느 곳에서든 재산을 탐내고 부를 숭상하는 것을 볼 때 궁핍에 대한 두려움의 힘을 알 수 있다. 약속의 땅은 신기루처럼 우리 앞에서 날아가 버린다. 지식나무의 열매도 손대면 부스러지는 소돔의 사과처럼 우리가 얻는 순간 변질된다.

부가 엄청나게 증대된 것도 사실이고 평균적으로 보아 더 안락해지고 여가가 많아지고 교양이 향상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개선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사회의 최하층은 개선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최하층의 상태가 어느 곳에서나 어느 면에서나 전혀 개선된 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생산력 증가에 기인한 개선은 어느 곳 어느 면에도 없다는 뜻이다. 소위 물질적 진보라고 하는 추세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의 필수 요소를 기준으로 볼 때, 최하층의 상태를 개선해 주지 못한다. 아니 실은 최하층의 상태를 오히려 압박한다. 새로운 힘은 기본적으로 사회를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오랫동안의 희망과 믿음과는 달리 사회구조의 밑바닥에서부터 작용하지 않고 상층과 하층의 중간의 어느 지점에 작용한다. 마치 커다란 쐐기가 사회의 밑바닥이 아니라 그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분리점의 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향상되지만 그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부서지고 만다." ({진보와 빈곤})


"사회 진보 삼천 년에 아직도 신음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모르타르와 벽돌로 만든 것처럼 견고한 굴레가 우리를 온갖 방법으로 옭아매고 있습니다!" 진보가 삼천 년 동안이나 이루어졌는데도 어린아이들의 애처러운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사회는 진보하고 또 진보합니다. 철도가 대륙을 횡단하고 전선이 도시를 그물처럼 수놓습니다. 매일 새로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매년 새로운 발전이 이룩됩니다. 그리하여 생산력이 증가하고 교환의 통로가 개척되고 확대됩니다. 그러나 못 살겠다는 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근심에 싸여 있고 빈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노동의 힘은 빠르게, 꾸준하게, 힘차게 발전하고 확대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생존을 위한 싸움은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노동은 어느 상품보다도 헐값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득한 창고 옆에서 사람들은 굶주려 말라가고 추워서 떨고 있습니다. 교회의 그늘에는 빈곤에서 오는 죄악이 자라고 있습니다." (연설문, "모세")


"많은 계층을 빈곤과 악에 빠뜨리는 나쁜 사회제도로 인해 사회가 입는 손실을 금전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가공할 금액이 될 것이다. 영국에는 공적인 구호 대상으로 백만 명 이상이 등록되어 있다. 뉴욕 시 하나만 해도 비슷한 목적으로 연간 칠백 만 달러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자금의 지출액과 자선단체 또는 개인의 지출액은 총 손실의 첫 항목이자 극히 작은 항목에 불과하다. 그 외에 현재의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로 인해, 사회가 현 생산수단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생산총량을 온전히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자선사업으로 인해 노동의 잠재소득이 소멸되고 또 무기력하고 준비성도 없고 게으른 습관이 생김으로써 입는 손실. 빈곤계층의 사망률 특히 유아사망률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조기 사망으로 인한 엄청난 금전적 손실. 빈곤이 심화되면 더욱 늘어나는 유흥주점으로 인한 낭비. 도둑, 창녀, 거지, 부랑자 등 빈곤과 절망에서 생기는 사회의 기생충 같은 존재로 인한 손실. 이들로부터 사회를 방어하는 데 드는 비용." ({진보와 빈곤})


"다섯 세기 전 영국 성인 남자가 부를 생산하는 능력은 오늘날에 비해 아주 보잘것없었다. 증기기관이 도입된 이래 기계 공업에 혁명을 일으킨 각종 발명과 발견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농업조차도 아주 미숙하고 생산성이 낮았다. 개량종 목초도 발견되지 않았고 감자, 당근, 무, 기타 오늘날과 같이 수확이 좋은 각종 식물이나 야채도 없었다. 윤작을 통한 이익도 잘 몰랐다. 농사도구도 삽, 낫, 도리깨, 조잡한 형태의 쟁기와 써레 등이 고작이었다. 가축도 지금에 비해 반 정도 크기 이상으로 자라지 못했고 양 한 마리의 털도 지금의 반에 못 미쳤다. 도로도 제대로 없었지만 그나마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고 수레도 숫자가 적었을 뿐 아니라 성능도 조잡하였기 때문에 백마일 떨어진 곳은 사실상 오늘날 런던과 홍콩 사이처럼 또는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사이처럼 교통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 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상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5세기 동안 생산기술이 발전한 후인 오늘날의 영국보다 나았다. 당시의 노동자는 요즘의 노동자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더 잘 살았다. 직장을 잃고 빈곤 속에서 동냥질을 하게 될까, 가족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자선에 기대게 될까 하는 염려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늘날 19세기 부유한 영국 도처를 지배하고 있는 극도의 빈곤은 당시 훨씬 가난했던 14세기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술은 경험에 의존할 뿐 미신적이었으며 위생과 방역은 아예 없었다. 전염병도 자주 돌았고, 교통 때문에 풍족한 지역에서 어려운 지역으로의 물자 상통이 어려웠기 때문에 기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풍요 속에서 굶어죽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여성이나 어린이가 지금처럼 일하지 않았고, 노동절약적 기계류가 즐비한 오늘날의 미국 노동자도 달성하지 못한 하루 8시간 작업제가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미개 부족의 경우, 노동생산물 총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각자 독립적 생활을 해나갈 능력이 있다. 각자 자신의 거처를 지을 수 있고 나무나 가죽으로 카누를 만들 수 있고 옷을 만들 수 있고 무기나 덫이나 도구나 장식품을 제조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부족이 알고 있는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안다. 예를 들면 식용이 되는 식물은 무엇이며 어디에 가면 캘 수 있는지를 안다. 짐승, 새, 물고기, 곤충이 서식하는 방식과 장소를 안다. 해와 별 또는 꽃의 방향과 나무에 붙은 이끼를 보고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즉 모든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다. 자기 부족에서 떨어져도 살아나갈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관계에서 자유로운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이 미개인과 문명사회의 최하층 노동자와 비교해 보라. 사회의 부 가운데에는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물자도 많다. 그런데 노동자는 이 가운데 한 가지 물자 내지 그 물자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을 생산하면서 산다. 노동자는 자기가 일하는 데 필요한 도구조차 만들 수 없으며, 자신이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할 능력도 없는 도구로 일을 한다. 노동자는 미개인보다 더 장시간 더 힘들게 일을 하지만 미개인이 얻는 단순한 생활필수품 이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개인이 누리는 독립성을 잃고 산다. 자신의 힘으로 욕구를 직접 충족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일해 주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충족하지도 못한다. 이 노동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거대한 체인의 한 연결 부분에 불과하여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회 속의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고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줄어든다.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행하는 힘조차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마치 태양계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듯이―어떤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 힘이 박탈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초적 저주를 은혜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선인 양 그리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양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법제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 즉 신처럼 환경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노동자는 노예나 기계나 상품이 되어 버리고 어떤 점에서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나는 미개 상태를 감상적으로 동경하는 사람이 아니다. 루소, 샤또브리앙, 쿠퍼의 자연사상을 순진한 어린이처럼 추종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연 상태가 지능적 물질적으로 빈곤하며 그 생활이 저급하고 협소하다는 것을 안다. 문명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운명이며, 문명은 인간의 모든 힘이 해방되고 고양되고 세련된 것이라고 믿는다. 문명의 혜택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처지에서, 미개 상태를 그리면서 아쉬워하는 수도 있지만 이는 인간이 반추동물을 선망하는 수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실에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문명의 핵심에는 극도의 미개인이라도 자기 처지와 바꾸고 싶지 않을 계층이 널리 존재한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테라델푸에고의 토인, 호주의 흑인, 북극의 에스키모, 고도로 문명된 영국의 최하층 중 하나를 골라 삶을 산다면 앞의 세 미개인의 운명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의 한 가운데서 빈곤에 처한 계층은 미개인이 누리는 인간적 자유도 없이 빈곤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협소함과 왜소함에서는 미개인보다 더 하면서 천부의 능력을 성장시킬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미개인보다 더 너른 세상에 산다고 하지만 이는 누리지 못할 축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


"아질 공작(Duke of Argyil)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현대의 아테네"라고 자랑하고 있는 에딘버러에 간다고 하자. 지붕에서 활을 쏘아 맞힐 수 있는 거리 내에 교회가 스무 군데나 있는 그런 지역의 주택에서 사는 사람의 생활이 공작이 기르는 천한 개만도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또 공작이 그런 기괴한 건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어두컴컴한 집에 들어간 다음 문을 닫고 암흑 속에서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후에 공작이 필자를 비판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 공작이 자선기관에 (아, 정의가 없는 자선은 얼마나 공허한가!) 간다고 하자. 이곳에서는 엄마가 일터로 간 동안 굶고 지낼 아이들을 돌보면서 음식을 먹이고는 있으나 아이들의 사지가 영양 결핍으로 오그라들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에게도 해주었듯이 공작에게도, 맨발로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리고 있는 어떤 여자 애에게 빵을 주자 여자 애는 눈을 들고 두 손을 깍지 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요에 감사드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내게 해 준 사람은 그 심각한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러나 나는 공작에게 묻고 싶다. 빵 한 조각에 감사하는 그 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과연 얻었는가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인색하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아이와 하나님 사이를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 가로막고 있단 말이 아닌가? 그것이 사회제도라면 쉬지 않고 그 제도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그것이 사람이라면 그 목에 맷돌을 매어 바다 깊숙이 보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정으로의 귀결")


"우리는 빈곤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최고로 발전한 나라에서조차 수많은 사람의 빈곤을 그저 팔자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 속에서도 건강한 생활을 위한 필수품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과, 힘들여 일해도 그저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정치경제학 교수들은 이런 현상이 사회법칙의 결과이므로 불평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성직자들은 이런 현상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의도하신 삶의 모습이라고 설교한다! 만일 관중의 10분의 1도 제대로 구경을 못하게 극장을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엉터리라고 부를 것이다. 만일 잔치를 치르면서 손님의 10분의 9에게 대접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음식을 조금밖에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바보 또는 그 이하의 말로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기독교리를 설교하는 성직자마저 우주의 위대한 설계자께서, 오묘한 자연을 만드는 능력을 갖추신 그 분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볼품없이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그 분의 피조물인 인간의 대다수가 결핍과 고통과 잔인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정신력의 발전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래서 전 생애를 단순한 생존을 위해 바쳐야 하는 존재로 운명 지워졌다고 한다!" ({사회문제})
2002-04-18 23:43:50


     
  

관리자로그인~~ 전체 7개 - 현재 1/1 쪽
박창수
2002-04-18
1399
6
박창수
2002-04-18
1428
5
2002-03-24
1261
4
2002-03-24
1380
3
2002-03-24
1442
2
2002-03-24
1299
1
2001-12-25
1842

[맨처음] .. [이전] 1 [다음] ..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