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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인왕과 국가
  

{국가}

{국가}의 독특한 성격은 {정치가}와의 비교를 통해 선명해 진다. "{정치가}는 지식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삼부작 ({시어티터스}-{소피스트}-{정치가})을 구성하는 대화편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지식 그 자체 혹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이란 전체에 대한 지식의 축구이며 전체에 대한 명상이다. 전체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에 대한 지식은 전체에 대한 부분으로서의 부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말한다. 철학은 가장 최고의 인간 행동이며, 인간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가운데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전체는 인간 없이는 전체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이 완전해지지 않고서는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노력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으며, 이러한 노력은 특별한 종류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지식은 명상적이며 이론적이지 않고 처방적이며 명령적이며 실천적이다. {정치가}는 '실천적 지식에 대한 이론적 논의'(a theoretical discussion of practical knowledge)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는 실천적 혹은 정치적 삶에서부터 철학 혹은 이론적 삶으로의 상승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는 '이론에 대한 실천적 논의'(a practical discussion of theory)를 보여준다. {국가}는 인간 문제의 해결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해결은 이론적 삶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에서 제시되는 지식은 처방적이며 명령적이다. {정치가}에서의 최고의 실천적 지식(즉 왕의 지배기술)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왕의 지배기술에 대한 성격을 단순히 규정지음으로서 명령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정치가}는 지배자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해석에 따른다면, 철학자는 전체의 질서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정치가는 국가의 질서를 수립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전체질서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철학으로 나타나며, 국가질서의 실천적 수립은 기술로서 나타난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본성과 그가 변증법을 통해 밝혀낸 전체의 질서가 무엇인지 논의한다. 철학자는 사물의 본질 (the nature of things)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즉 그는 이데아들(ideas of things)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데아들을 통괄하는 '좋음의 이데아'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진리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뛰어난 이성을 지닌 사람만이 접할 수 있다. 철학자는 진리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있다. 철학적 탐구를 통해 바람직한 정치질서의 원칙을 밝힌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질서를 어떻게 현실의 세계에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즉 그가 깨달은 진리를 밝힐 것을 요구 당했을 때, 그가 글라우콘에게 행한 다음과 같은 말은 철학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진리를 탐구해야하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고있다.

신중하고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이 위대하며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안전하고 고무적인 일이네. 그러나 한 사람이 의심에 빠진 상태로 계속 진리를 추구하고 있을 때 - 내가 지금 그런 경우이지만 - 논의를 제시하는 것은 놀랍고도 빗나가는 일일세. 이같이 얘기하는 이유는 내가 남에게 웃음을 자아낼까 봐 두려워하는 것 - 그것은 어린애 같은 생각인데 -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이 빗나가지 않아야 할 진리에서 내가 벗어남으로서 내 자신도 잘못되고 될 뿐만 아니라 나의 친구들도 나로 인해 잘못된 길로 빠지게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네. 글라우콘, 앞으로 내가 말할 것에 대해 아드라스테이아(Adrasteia) 앞에 엎드려 그의 심판을 받겠네. 나는 비자발적인 살인자로 판명되는 것이 법에 내재되어 있는 훌륭하고, 좋고, 정의로운 것들에 관하여 속이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네.

소크라테스는 망설임 끝에 밝힌 진리는,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녀의 평등이 보장되어야 하며, 여자들과 자식들의 공유가 이루어져야 하며, 재산의 공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요건이 이상사회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이상사회를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가장 핵심적인 충분조건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철인왕의 등장이다. 철인왕은 철학자가 왕이 되든지 혹은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그 존립이 가능하다. 철학자가 왕이 될 필연성이 존재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될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철인왕이 존재할 가능성은 대단히 높아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필연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철인왕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지 않다고 말한다.

철인왕은 우주의 질서이며 신의 질서인 좋음의 이데아를 국가의 질서로 변환시킨다. 좋음은 자연의 본성이며, 좋음은 자연과 다르지 않다. 좋음은 정의와 덕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이러한 좋음의 이데아에 의해서 국가가 만들어지고 시민이 교육된다면 그러한 국가와 시민은 완전하게 되고 행복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국가}의 중심주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좋음과 정의와 행복' (Goodness, Justice, and Happiness)이 일치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능동적 역할이 요구된다. 좋음의 이데아는 스스로 인간의 정치질서에 구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패턴'이며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정치질서에 구현될 수 있다.

철학이 철학화하는 것이 인간의 기술에 의해서 정치화될 때 (when what philosophy philosophizes is politicized by human art), 정의롭고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정치질서가 가능해 진다. 이러한 면을 '자연과 기술' (Nature and Art)의 관점에서 본다면, 좋은 정치적인 삶을 위해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자연'을 이해한다면, 기술은 필요 없게 되고 따라서 정치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필연성에 의해 소수의 인간만이 자연의 본성을 알 수 있다면, 무지한 다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게 된다. 자연적 질서에 근거하여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는 기술이며, 자연적 질서에 근거하여 사람을 만드는 교육 또한 기술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음의 이데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이것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는 태양의 비유나 선분의 비유를 통하여 좋음의 이데아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동굴의 우화를 통하여 철학자와 국가와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에는 동굴의 우화의 분석을 통하여 그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동굴의 비유
동굴 속에서 팔다리를 속박당한 채 정면에 있는 벽만을 응시하도록 되어 있는 한 개인을 상상해 보자.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벽의 뒤쪽에 있는 불에 의하여 앞의 벽면에 투사된 사물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가 어떤 계기로 인해 팔다리의 속박을 풀고 뒤를 돌아보게 되고 자기가 여태까지 진실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물의 환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계속하여 동굴을 힘겹게 올라가서 지상에 도달하게 되고, 사물의 그림자로부터 시작하여 사물자체, 그리고 태양까지 보게 된다. 그 순간 그는 만물의 근원이 태양임을 깨닫게 되고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상승과정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한 사람을 철학자라 한다면 과연 이 철학자가 자기가 살았던 동굴로 다시 돌아가겠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철학자가 진리의 세계에서 순수한 쾌락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세계에서 하강하여 현실의 세계로 돌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발견한 좋음은 실현될 수 없다. 그를 다시 하강하게 만드는 필연성이 필요한데 그것은 결국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 (Eros)에 의존하게 된다. 그가 동굴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고, 눈부신 태양 빛에 눈이 멀지 않게끔 하기 위하여 그림자부터 쳐다보고 사물을 보고 궁극적으로 태양을 보았듯이, 그가 다시 진리의 세계에서 환영의 세계인 동굴로 하강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어둠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가 어두운 동굴에 다시 왔을 때 부딪치는 것은 동굴 속에서 결박당한 채 환영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편견과 편견에 기반한 지배자들의 권력이다. 철학자가 말하는 진리는 동굴의 지배자에게 있어서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요소가 된다. 철학은 국가에 대립하게 된다. 진리는 국가에 유용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가지고 올바른 정치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신에 대한 불경죄와 청소년의 교육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죽음에 다다를 수 있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좋음의 이데아를 현실사회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데아의 '정치화'(politicization)는 다수의 편견과 기존 정치질서의 파괴를 두려워하는 통치자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데아의 정치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왕이 되든지, 왕이 철학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철학과 권력 상호간에 끌어당기는 힘이 각각의 본성상 존재하기 어렵다면, 이상국가가 생성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지게 된다.

좋음의 이데아를 아는 철학자가 그 이데아에 따라 이상적 정치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술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귀한 거짓말, 종교, 신화를 이용할 줄 아는 기술이다. 철학자만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고귀한 거짓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렇지만 철학자가 소수일 수밖에 없다면,

-거짓신화
철학자는 이상국가의 형성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모든 시민은 땅의 자식이라는 신화와 신은 금, 은, 청동, 철의 성분을 지닌 인간을 각기 만들었다는 신화는 이상국가 수립의 출발점이 되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항상 존재하는 것' (Being always)에 대한 탐구가 지식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 (Nothing)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무지'(ignorance)가 산출될 수밖에 없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거짓말' (true lie)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말을 한 결과 거짓말을 한 사람과 거짓말을 믿은 사람 모두에게 '좋음'을 가져다준다면 그러한 거짓말은 '고귀한 거짓말' (noble lie)이 된다. 의사가 환자의 건강을 생각해서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은 고귀한 거짓말이 된다. 환자는 의사에게 고귀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병의 치료를 원하는 환자가 자기의 증세에 관하여 거짓말을 한다면 그 병에 대한 치료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통치자만이 정치공동체의 정의와 행복을 위하여 '고귀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어의 신화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탄생신화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옛날 얘기'의 형식으로 사람이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모순되게도 어린이에 대한 최초의 교육은 거짓말에 근거하여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국가}에서 사용하는 또 하나의 신화는 '어의 신화'(Myth of Er)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아울러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현세에 한정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설득하기 위하여 이 신화를 이용하고 있다. '어'가 전쟁 중에 죽은 후 10일째 발견되어 집으로 옮겨진 후 12일째 장례식이 치러지기로 되어 있는 날 환생하여, 자기가 보고 온 사후의 세계에 대해 얘기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이 신화는, 인간 영혼이 불멸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인간은 현세에 있어서 정의로움에 대한 보답을 못 받을 지도 모르지만 사후의 세계에 있어서는 반드시 열 배로 보상을 받으며 축복 받은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지만, 부정의한 인간은 현세에 그의 부정의에 근거하여 쾌락, 부, 권력을 누릴 지 몰라도 사후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부정의에 대한 처벌이 열 배로 행해지며 그러한 처참한 고통을 겪은 이후 저급한 영혼의 형태로 이승으로 환생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위의 두 가지 신화는 철학과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은 철학은 종교를 이용함으로써 좋은 정치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세계에서 분명히 신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불멸한다. 다수의 신들은 최고의 존재자들 (supreme beings)로 존재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존재'(Being) 그 자체보다는 '존재'를 가능케 하는 '좋음'(Goodness)이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좋음의 아이디어는 신들이 존재하는데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최상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신은 좋음의 아이디어이며, '좋음의 아이디어의 신' (The God of the Idea of the Good)은 세계를 만드는 신들(gods)을 창조하는 최상의 신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이데아이며 만물이 따라야할 패턴( pattern)이다. 기독교의 유일신이 최고의 존재자로서 '언어'(Logos)로써 혼돈과 무질서에서부터 세계를 좋게 창조했다면, 플라톤의 신은 좋음이라는 패턴을 보여주는 신이며, 좋음의 근원을 밝혀주는 신이다. 기독교의 유일신이 '계시'(revelation)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와 좋음을 밝히고 있다면, 플라톤의 신은 '이성'(reason)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다. 이성적 접근을 통한 우주적 질서의 이해와 그 이해를 통한 정치적 질서의 수립이 플라톤의 {국가}의 핵심주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주가 이성에 의해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그는 한 변의 길이가 1인 직각이등변 삼각형에서 루트 2 이라는 무리수 (irrational number)의 값을 지닌 빗변이 존재하고, 지름과 원주사이에 파이라는 무리수로 표현되는 관계가 존재하듯, 이성이 우주적 질서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는 우주의 비이성적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측면의 대표적인 예는 '사랑'(Eros)의 존재이며, 그 의미에 관해서는 {향연} (Symposium)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a lover of wisdom)이다. 소우주인 철학자의 영혼 속에서 지혜와 사랑이 결합되고 있다면, 대우주 역시 지혜와 사랑이 결합되어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인간의 본성 (human nature)에 의거해서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고자 하는 {국가}에서 에로스에 관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그가 설계한 이상국가가 철저한 기반 위에 놓여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출처:http://godislove.net/misupart/
(사회철학)
2002-06-24 00: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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